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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작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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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의 아들로, 1763년 작센 선제후가 되었다. 그는 나폴레옹의 동맹국으로 활동하며 바르샤바 공국의 대공을 겸임했지만,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패배 이후 국토를 프로이센에 잃었다. 빈 회의에서 영토를 상실한 후 작센 왕으로 남은 그는 분단된 국가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며, "정의로운 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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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작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마르첼로 바치아렐리 (Marcello Bacciarelli)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초상화 (1808-1809년경)
마르첼로 바치아렐리, 1809년
출생일1750년 12월 23일
출생지신성 로마 제국, 자유 작센 선제후국, 드레스덴
사망일1827년 5월 5일
사망지독일 연방, 작센 왕국, 드레스덴
매장지드레스덴 대성당, 드레스덴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서명image_file: Frederick Augustus I of Saxony signature.svg
작위
작센 선제후1763년 12월 17일 – 1806년 12월 20일
작센 국왕1806년 12월 20일 – 1827년 5월 5일
바르샤바 공작1807년 6월 9일 – 1815년 5월 22일
통치
선제후 즉위1763년 12월 17일
작센 왕 즉위1806년 12월 20일
선임자 (선제후)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후임자 (선제후)없음 (왕국으로 전환)
후임자 (국왕)안톤
바르샤바 공국
재위 기간1807년 6월 9일 – 1815년 5월 22일
선임자신설
후임자알렉산드르 1세 (폴란드 왕)
리투아니아 대공 (주장)
재위 기간1812년 7월 1일 – 1812년 12월 14일
선임자알렉산드르 1세 (러시아 황제로서 명목상 통치자)
후임자알렉산드르 1세
배우자 및 자녀
배우자아말리에 폰 팔츠-츠바이브뤼켄-비르켄펠트 (1769년 결혼)
자녀마리아 아우구스타 폰 작센
가문
가문베틴 가문
아버지 및 어머니
아버지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어머니마리아 안토니아 폰 바이에른
섭정
섭정프란츠크사버 (1763–1768)
섭정마리아 안토니아 (1763–1768)

2. 생애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마리아 안토니아 폰 바이에른의 아들로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1763년 아버지의 선제후 자리를 승계받으면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가 되었으나, 나이가 어려 1768년까지 숙부 프란츠 크사버가 섭정을 맡았다. 1770년에는 마리아 아말리에 아우구스타와 결혼하여 외동딸 마리아 아우구스타를 두었다.

1778년부터 1779년 사이에 일어난 바이에른 왕위계승전쟁에 참전해 프로이센 편을 들어 바이에른이 오스트리아에 편입되는 것을 막았다. 협조 대가로 프로이센의 재정 지원을 받았고, 1785년 프로이센이 주도한 군주동맹에 가입하였으나, 1790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분쟁 중에서는 중립을 지켰다. 1791년에는 폴란드 왕위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했고, 1792년 마지못해 작센은 대프랑스 동맹에 가입했으나 1796년에 패전했다.[3]

1806년 다시 프로이센 편으로 전쟁에 참여했으나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크게 패해 나폴레옹과 평화협상을 맺어 작센 왕의 칭호를 받았고, 1807년에는 바르샤바 공국을 얻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동맹자로 남아 1813년 5월 뤼첸 전투에서 승리해 협상을 중단했다. 그러나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작센군은 패했고, 아우구스트는 포로가 되어 1815년 빈 회의에서 프로이센에게 국토의 3/5를 잃었다. 이후 나머지 생애는 분단된 국가의 재건을 위해 애썼다.[2]

1795년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포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농업과 상공업 발전, 법 제도 개혁, 학예 진흥에 힘썼다. 그의 치세에 작센의 산업화는 크게 진전되었고, 드레스덴라이프치히는 독일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1827년 5월 5일에 드레스덴에서 사망했고,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왕위는 동생 안톤이 이었다.

2. 1. 작센 선제후 및 폴란드 왕위 계승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마리아 안토니아 폰 바이에른의 아들로, 1763년 아버지의 선제후 자리를 승계받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가 되었다.

1778년부터 1779년 사이에 일어난 바이에른 왕위계승전쟁에 참전해 프로이센 편을 들어 바이에른이 오스트리아에 편입되는 것을 막았다. 협조 대가로 프로이센의 재정 지원을 받았고 1785년 프로이센이 주도한 군주동맹에 가입하였으나 1790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분쟁 중에서는 중립을 지켰다.

1791년에는 폴란드 왕위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했고[3] 1792년 마지못해 작센은 대프랑스 동맹에 가입했으나 1796년에 패전했다.

1806년 다시 프로이센 편으로 전쟁에 참여했으나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크게 패해 나폴레옹과 평화협상을 맺어 작센 왕의 칭호를 받았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의 작센 선제후로서의 세 명의 전임자는 폴란드 국왕이었지만, 그는 어린 나이 때문에 1764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 선거에서는 자격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791년 5월 3일 헌법이 폴란드 세임에 의해 비준되었을 때,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동시에 작센 왕가의 수장은 바로 그 헌법 제7조를 통해 폴란드 왕위 계승자로 확정되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1798년 스타니스와프가 사망한 후 왕위를 거절했는데, 이는 그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그리고 러시아와의 분쟁에 휘말릴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3]

1763년 10월, 할아버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 (폴란드 국왕 아우구스트 3세)가 사망하고, 뒤를 이은 아버지가 재위 2개월 만에 급사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로서 선제후위를 이었지만, 나이가 어려 1768년까지 숙부 프란츠 크사버가 섭정을 맡았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는 처음 프랑스 혁명의 파급을 두려워하여, 1791년필니츠 선언에서 호스트를 맡은 후,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도 프로이센 왕국과 동맹하여 반프랑스 측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1806년 10월 14일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 국왕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대패한 것을 보고 프로이센과의 동맹을 파기, 포젠 조약에서 프랑스와 강화하여 황제 나폴레옹 1세로부터 왕호를 획득했다.

2. 2. 대프랑스 동맹과 나폴레옹 전쟁

1778년부터 1779년 사이에 일어난 바이에른 왕위계승전쟁에 참전해 프로이센 편을 들어 바이에른이 오스트리아에 편입되는 것을 막았다. 협조 대가로 프로이센의 재정 지원을 받았고 1785년 프로이센이 주도한 군주동맹에 가입하였으나 1790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분쟁 중에서는 중립을 지켰다.[3] 1791년에는 폴란드 왕위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했고,[3] 1792년 마지못해 작센은 대프랑스 동맹에 가입했으나 1796년에 패전했다.

1806년 다시 프로이센 편으로 전쟁에 참여했으나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크게 패해 나폴레옹과 평화협상을 맺어 작센 왕의 칭호를 받았고 1807년에는 바르샤바 공국을 얻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동맹자로 남아 1813년 5월 뤼첸 전투에서 승리해 협상을 중단했다. 그러나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작센군은 패했고 아우구스트는 포로가 되어 1815년 빈 회의에서 프로이센에게 국토의 3/5를 잃었다.

1791년 8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의 회담을 필니츠 성에서 주선했다. 이 회담은 부분적으로 프랑스의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동요에 맞서 프랑스 군주제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2] 필니츠 선언은 프랑스 혁명 정부에 대한 군사 행동의 가능성을 경고했는데, 이는 1792년 4월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을 선포할 근거를 제공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자신은 이 선언에 서명하지 않았다.

작센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에 형성된 프랑스 제1 공화국에 대항하는 방어 동맹과는 아무런 관계를 맺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93년 3월에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의회가 제국 전쟁을 선포하면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이에 참여해야 했다.

1795년 4월, 프로이센이 제3차 폴란드 분할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프랑스와 갑자기 별도의 평화 조약을 체결했을 때 작센에는 큰 우려가 있었다. 프랑스가 동쪽으로 진격하여 독일 영토로 들어오고 신성 로마 제국이 별도의 평화를 체결하기 위한 추가 조건이 합의된 후, 작센은 1796년 8월 프랑스에 대항하는 연합에서 탈퇴했다.

1806년 라인 동맹 창설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이는 결국 신성 로마 제국해체로 이어졌다. 작센이 왕국으로 승격될 예정이었던 북독일 제국이라는 프로이센의 구상에 대해 그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1806년 9월 이후, 라인강 좌안에서 프랑스군 철수를 요구하는 베를린 최후통첩에 대응하여 나폴레옹은 튀링겐까지 진격했다. 그 시점에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프로이센과 손을 잡았다. 그러나 1806년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의 쌍둥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작센 군대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프로이센 정부와 군대는 이후 동쪽으로 급히 철수했다. 프로이센의 의도에 대한 정보도 없이 나폴레옹 군대가 작센을 점령하려 하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평화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1806년 12월 11일 포즈난에서 양측의 권한 있는 대표자들이 조약에 서명했다. 그 조약에 따라 작센은 라인 동맹에 가입하고 튀링겐 일부를 새롭게 조직된 베스트팔렌 왕국에 넘겨주어야 했다. 그 보상으로 작센은 코트부스 주변 지역을 얻었고 바이에른 왕국뷔르템베르크 왕국과 함께 동맹 국가로서 왕국의 지위로 승격되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1806년 12월 20일 작센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틸지트 조약 이후, 1807년 7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나폴레옹과 체결한 조약에 따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바르샤바 대공으로도 임명되었다. 그는 1795년 폴란드 의회(Sejm)에서 폴란드 왕위 제안을 거절했지만, 두 번째로 폴란드 칭호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2][3]

1813년 1813년 독일 전역 동안 작센은 다른 많은 교전 국가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 나라는 여전히 나폴레옹의 강력한 지배를 받고 있었고, 동시에 전쟁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1813년 가을 라이프치히 전투(국민 전투)가 시작될 때 작센의 현지 인구는 약 200만 명이었는데, 거의 100만 명의 군인이 이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가 편을 바꿀 경우 작센을 적대 지역으로 간주하고 그에 따라 대우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위협했다. 결과적으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의 행동의 여지는 매우 제한되었다. 그는 국가의 안녕을 경솔하게 위태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1806년에 프로이센이 그를 단순히 버렸던 방식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국왕은 나폴레옹과의 공개적인 결별과 선전포고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서 1813년에 제6차 대프랑스 동맹과 신중하게 동맹을 맺으려고 시도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 군대가 봄에 작센에 진입하자 국왕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먼저 남쪽으로 이동하여 레겐스부르크에서 오스트리아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었다. 작센-오스트리아 조약은 4월 20일에 체결되었고 국왕은 동시에 프로이센과 러시아 동맹국들에게 이를 알렸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가 외교적 움직임을 숨길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5월 2일 뤼첸에서 프로이센-러시아 군대를 격파한 후 국왕을 작센으로 긴급 소환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그에게 제시된 최후통첩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오스트리아로부터 구체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 없고,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이 패배하여 프랑스에 평화 신호를 보내는 상황에서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느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의 결정은 국가에 거의 아무런 구제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국왕의 탈주에 가까운 행동에 분노한 나폴레옹은 동시에 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해 모든 가용 병력의 완전한 동원에 의존하여 작센의 모든 자원을 가혹하게 요구했다. 또한 이 나라는 전쟁의 변화하는 운명과 관련된 군대의 이동과 주둔으로 고통받았다. 8월 말에 동맹군은 드레스덴 전투에서 다시 나폴레옹을 격파하는 데 실패했다. 한편, 작센은 전쟁의 주요 무대가 되었고 드레스덴은 프랑스군의 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9월 9일에 테플리츠에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 및 러시아와의 동맹을 체결했다. 9월, 작센의 나폴레옹 군대가 확장된 연합군 앞에서 후퇴하기 위해 정렬되자 작센 왕립군 내에서 처음으로 동맹군으로의 탈주가 발생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봄의 경험을 감안하여 프로이센을 불신했고, 특히 프랑스의 지배에 이전처럼 노출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가 즉시 연합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에 실망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나폴레옹과의 결별을 선택하지 않았다. 라이프치히 전투(국민 전투)에서 작센 군대와 폴란드 군대는 나폴레옹 편에서 싸웠다. 프랑스의 명백한 패배를 고려하여, 더 큰 규모의 작센 군대가 전투 중에 연합군으로 넘어갔고, 폴란드 군대는 거의 전멸했다.

2. 3. 빈 회의와 작센 분할

1814년1815년 빈 회의에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어려운 지리적 위치, 전쟁의 변동, 오스트리아의 지원 부족, 그리고 자신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 프로이센-러시아 동맹은 칼리쉬 조약에서 러시아바르샤바 공국을 차지하고, 프로이센이 작센을 병합하기로 합의하면서, 처음부터 작센을 반(反)나폴레옹 동맹에 가입시키는 데 진정한 의도가 없었다.[4]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프로이센-러시아 동맹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의 지원 제안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에 맞선 더 광범위한 투쟁에서 작센과의 동맹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포로로 잡혀 베를린 근처 프리드리히스펠데로 끌려갔다.[4]

나폴레옹 전쟁 말, 작센의 사기를 저하시킨 것은 러시아의 레프 레프니친 공이 관리하던 정부나 프로이센 점령군보다는 프로이센 재상 슈타인 남작의 강압적인 태도였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과거 동맹이었던 나폴레옹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빈 회의 참석이 거부되었다.[4] 이러한 처사는 칼리쉬에서 합의된 병합 계획을 실행하려는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의도 외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 작센이 완전히 버려지지 않은 것은 오스트리아프랑스가 지나치게 강화된 프로이센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작센 문제가 회의를 깨뜨릴 위협이 되자, 동맹국들은 1815년 1월 7일 차르의 중재로 작센을 분할하는 데 동의했다.[4]

1815년 2월 프로이센 감옥에서 풀려난 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처음에는 영토 분할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5월 18일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제시한 평화 조약에 동의했다. 1815년 5월 21일 조약 서명으로 작센 영토의 57%와 인구의 42%가 프로이센으로 넘어갔다.[4]

비텐베르크토르가우를 포함한 여러 지역이 프로이센의 작센 주에 편입되었다. 하부 루사티아는 브란덴부르크 주에 편입되어 국가로서의 존재를 잃었고, 상부 루사티아의 일부는 실레지아 주에 추가되어 헌법적 자치를 상실했다.[4]

1815년 5월 22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바르샤바 공국의 통치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바르샤바 공국 영토는 주로 러시아에, 일부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병합되었다. 러시아에 할당된 지역에는 폴란드 왕국이 세워졌다. 옛 왕도 크라쿠프는 별개의 공화국이 되었으나, 11월 봉기 이후인 1831년에 내부 자치가 폐지되었다.[4]

2. 4. 작센 왕

1806년 프로이센 편으로 참전했으나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크게 패해 나폴레옹과 평화협상을 맺어 작센 왕의 칭호를 받았다.[2] 1807년에는 바르샤바 공국을 얻었다. 1812년 러시아 원정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동맹자로 남아 1813년 5월 뤼첸 전투에서 승리해 협상을 중단했다. 그러나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작센군은 패했고 아우구스트는 포로가 되었다.[2] 1815년 빈 회의에서 프로이센에게 국토의 3/5를 잃었다. 이후 나머지 생애는 분단된 국가의 재건을 위해 애썼다.[2]

1806년 12월 11일 포즈난에서 조약에 서명함으로서, 작센은 라인 동맹에 가입하고 튀링겐 일부를 베스트팔렌 왕국에 넘겨주어야 했다. 그 보상으로 작센은 코트부스 주변 지역을 얻었고 바이에른 왕국뷔르템베르크 왕국과 함께 동맹 국가로서 왕국의 지위로 승격되었다.

1813년 독일 전역 동안 작센은 다른 많은 교전 국가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 나라는 여전히 나폴레옹의 강력한 지배를 받고 있었고, 동시에 전쟁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1813년 가을 라이프치히 전투(국민 전투)가 시작될 때 작센의 현지 인구는 약 200만 명이었는데, 거의 100만 명의 군인이 이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가 편을 바꿀 경우 작센을 적대 지역으로 간주하고 그에 따라 대우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위협했다.

제6차 대프랑스 동맹과 신중하게 동맹을 맺으려고 시도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 군대가 봄에 작센에 진입하자 레겐스부르크에서 오스트리아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었다. 작센-오스트리아 조약은 4월 20일에 체결되었고 국왕은 동시에 프로이센과 러시아 동맹국들에게 이를 알렸다. 뤼첸에서 프로이센-러시아 군대를 격파한 후 국왕을 작센으로 긴급 소환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그에게 제시된 최후통첩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국왕의 탈주에 가까운 행동에 분노한 나폴레옹은 작센의 모든 자원을 가혹하게 요구했다. 또한 이 나라는 전쟁의 변화하는 운명과 관련된 군대의 이동과 주둔으로 고통받았다. 8월 말에 동맹군은 드레스덴 전투에서 다시 나폴레옹을 격파하는 데 실패했다. 한편, 작센은 전쟁의 주요 무대가 되었고 드레스덴은 프랑스군의 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9월 9일에 테플리츠에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 및 러시아와의 동맹을 체결했다. 9월, 작센의 나폴레옹 군대가 확장된 연합군 앞에서 후퇴하기 위해 정렬되자 작센 왕립군 내에서 처음으로 동맹군으로의 탈주가 발생했다.

라이프치히 전투(국민 전투)에서 작센 군대와 폴란드 군대는 나폴레옹 편에서 싸웠다. 프랑스의 명백한 패배를 고려하여, 더 큰 규모의 작센 군대가 전투 중에 연합군으로 넘어갔고, 폴란드 군대는 거의 전멸했다.

1815년 2월 프로이센 감옥에서 풀려난 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처음에는 그의 영토 분할에 동의하는 것을 미루었다. 그러나 5월 18일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제시한 평화 조약에 동의했다. 1815년 5월 21일 조약 서명으로 작센 영토의 57%와 작센 인구의 42%가 프로이센으로 넘어갔다.

비텐베르크, 마르틴 루터필리프 멜란히톤에 의해 유명해진 국립 대학교의 소재지(이미 1817년 프로이센 할레 대학교와의 합병으로 사라졌다)와 현명공 프리드리히의 출생지이자 거주지였던 토르가우는 프로이센이 작센 주라는 이름으로 창설한 새로운 혼합 구역 중 하나에 편입되었다. 하부 루사티아는 상부 루사티아와 마찬가지로 작센 통치하에서 헌법적 자치를 유지했지만, 브란덴부르크 주에 편입되어 국가로서의 존재를 잃었다. 상부 루사티아는 임의로 분할되었는데, 괴를리츠를 포함하여 프로이센에 할당된 지역은 실레지아 주에 추가되었고, 이 지역들 역시 헌법적 자치를 상실했다.

1815년 5월 22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바르샤바 공국의 통치자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그 영토는 주로 러시아에, 일부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병합되었다. 러시아에 할당된 지역에는 러시아 왕위와 세습적 연합을 이루는 폴란드 왕국이 세워졌다. 옛 왕도 크라쿠프는 새로운 왕국에 더 이상 속하지 않았고, 별개의 공화국이 되었다. 처음에는 누렸던 내부 자치는 11월 봉기 이후인 1831년에 폐지되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의 통치 말년 12년은 대부분 조용히 흘러갔다.[2] 1806년까지 작센의 이익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으로 나타났던 국왕의 보수적인 성격은 나폴레옹의 지배를 경험한 후 더욱 굳어졌다. 정치 개혁과 관련하여 국왕은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나폴레옹 사망 기념일에 사망한 1827년까지 작센 국가의 헌법적 구성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3. 자녀

사진이름생일사망기타
사산아1771년1771년
사산아1775년1775년
마리아 아우구스타 폰 작센 왕녀1782년 6월 21일1863년 3월 14일미혼으로 사망
사산아1797년1797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1769년 1월 17일 만하임에서 (대리 결혼), 같은 해 1월 29일 드레스덴에서 (직접 결혼)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누이인 츠바이브뤼켄-비르켄펠트의 아말리와 결혼했다. 아말리는 결혼 생활 동안 네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딸은 마리아 아우구스타 한 명뿐이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드레스덴의 유대인 궁정 재정가의 딸과의 불륜으로 사생아 딸을 두었다.

4. 평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의 통치 말년 12년은 대체로 조용하게 흘러갔다.[2] 국왕은 1806년까지 작센의 이익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보였으나, 나폴레옹의 지배를 경험한 후 보수적인 성격이 더욱 굳어졌다. 정치 개혁과 관련하여 국왕은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나폴레옹 사망 기념일에 사망한 1827년까지 작센 국가의 헌법적 구성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정의로운 자"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드레스덴의 로마 가톨릭 대성당에 안장되었다.[3]

4. 1. 긍정적 평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1815년 7월 작센으로 돌아왔을 때, 온 국민이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1] 작센에서 양도된 영토의 주민들조차 새로운 통치자들을 냉담하게 바라보며 왕에게 충성을 표하는 모습을 보였고, 곧 "강제적인 프로이센"이 된다는 개념이 널리 퍼졌다.[1]

1815년 초, 작센군 연대 대부분이 주둔하던 리에주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1] 프로이센 국왕의 명령에 따라 블뤼허 원수는 합병된 영토 출신 병사들을 해산시키려 했으나, 아직 출발하지 않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의 병사들은 이에 대해 폭동을 일으켰다.[1] 블뤼허는 도시에서 도망쳐야 했고, 추가 프로이센 군대를 소집해서야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1]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가 귀환했을 당시 작센의 여론은 확실히 그의 편이었다.[2] 프로이센의 정책이 국가와 왕 모두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고, 해방 전쟁의 보상이 분배되면서 베를린의 특정 이익 집단의 탐욕이 명확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2]

4. 2. 부정적 평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1806년까지 작센에 대한 충성을 보였으나, 나폴레옹 지배를 겪으며 보수적인 성격이 굳어졌다.[2] 정치 개혁에 소극적이었고, 1827년 사망 시까지 작센의 헌법적 구성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루사티아 상류층의 권리를 존중하여 입법부 수용을 위한 정치 시스템 변화를 꺼렸기에, 많은 사람들의 열망은 좌절되었다. 반세기 이상 작센을 통치한 국왕에 대한 존경심은 줄어들었고, "정의로운 자"라는 칭호와 달리 지연된 경제 및 사회 재건에 대한 불만은 그의 동생 안톤 왕 시대에 표출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Anton Graff (1736-1813) - Friedrich August I, King of Saxony (1750-1827) https://www.rct.uk/c[...] 2023-12-16
[2] 간행물 Friedrich August I., König von Sachsen Duncker & Humblot 1878
[3] 서적 Der gefangene Sachsenkönig. Eine Erinnerung an Sachsens ersten König, Friedrich August I. (1750–1827) Tauchaer Verlag 1996
[4] 웹사이트 König von Sachsen Friedrich August I. – Biographische Informationen aus der WeGA http://www.weber-ges[...]
[5] 서적 Genealogie ascendante jusqu'au quatrieme degre inclusivement de tous les Rois et Princes de maisons souveraines de l'Europe actuellement vivans https://books.google[...] Frederic Guillaume Birnstiel
[6] 백과사전 Frederick Augustus I king of Saxony https://www.brit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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